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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 철학 칼럼 4] 노장에 대한 두 해석과 하이에크
[최진덕 철학 칼럼 4] 노장에 대한 두 해석과 하이에크
  • 프리덤뉴스
  • 승인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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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에 대한 두 해석과 하이에크

 

최진덕(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그렇다면 하이에크의 자유와 노장의 무위,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와 노장의 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고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애매하다. 그런 결론을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노장에 대한 해석 자체가 근본적으로 애매하기 때문이다.

노장에 대한 해석은 크게 보아 두 가지다. 하나는 노장이 무위자연의 도를 천지만물 너머의 궁극적 실체로 간주한다는 형이상학적 해석이다. 이런 해석이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일종의 통속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노장은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는 해체주의적 해석이다. 해체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노장은 각기 다른 천지만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로 흘러가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다 긍정한다.

하이에크와 노장이 겉으로 보기에는 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필자의 주장은 노장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에 따른 결론이다. 그런데 박흥기, 민경국 두 교수는 노장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에 따르면서 필자와는 반대로 하이에크와 노장이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어느 주장이 옳을까. 노장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면 자연은 인간보다 더 근본적이므로 인간은 자연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노장의 핵심적 가르침이 된다. 하이에크는 오늘날 주류 경제학자들처럼 오만한 이성을 중심에 두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에도 반대하고, 근대사회주의의 원조 루소처럼 자연을 중심에 두는 낭만주의적 자연주의에도 반대한다. 이성 중심의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와 자연 중심의 낭만주의적 자연주의는 무위자연의 도를 중심으로 하는 형이상학적인 노장과 마찬가지로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이에크 철학은 철저하게 인간세계 안에 머무는 휴머니즘이고 자연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아담 스미스는 젊은 시절 노장과 비슷하게 정념의 노예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한 적이 있고 장로교의 경건주의에도 귀를 기울였다. 반면 하이에크는 비엔나에서의 젊은 시절부터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그는 소유에 기초한 전통 도덕을 초월적으로 정당화해줌으로써 사회질서 유지에 도움을 준다는 데서 종교의 의미를 찾는다. 그에게 신이란 도덕과 가치의 전통을 의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이에크가 말하는 강제의 부재로서의 자유라든가 자생적 질서의 존중, 그리고 시장에 대한 국가의 불간섭은 모두 인간세계 안에서의 일들이다. 인간의 작위에 의해 굴러가는 인간세계 안에도 운동()과 정지()가 있다. 정지를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세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불간섭은 인간세계 안에서의 정지에 해당한다. 시장에 간섭을 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법의 지배를 위해 잠시도 운동을 멈출 수 없다. 이렇게 보면 하이에크와 노장은 피상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해체주의적 노장 해석에 따르면 결론은 정반대가 될 수 있다. 해체주의적 해석을 받쳐주는 핵심 논리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는 유()와 다른 어떤 것이라면 그 무는 이미 유의 일종이지 무일 수 없다. 무는 유를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이라 보지 말아야 무일 수 있다. ‘무는 곧 유라고 해야 한다. 무위자연이 유위작위(有爲作爲)와 다르다고 한다면 무위자연일 수 없다. 무언가를 자신과 다른 것으로 배제하면 이미 유위작위가 되기 때문이다. 무위자연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함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노장의 도를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천지만물의 궁극적 실체는 도가 된다. 반대로 해체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천지만물이 곧 도가 된다. 궁극적 실체 따위는 따로 있지 않다. 도덕경1장에 따르면, 말할 수 없는 것도 도(常道)이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도(非常道)이다. 그렇다면 결국 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자1편에 따르면, 대붕처럼 큰 것도 소요하고, 쓰르라미처럼 작은 것도 소요한다. 그렇다면 소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체주의적으로 해석된 노장은 자연도 긍정하고, 인간도 긍정한다. 선도 긍정하고, 악도 긍정한다. 질서도 긍정하고, 무질서도 긍정한다.

주어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긍정하는 노장 사상은 아무 사상도 아니라고 봐야 한다. 노장 사상이 어떤 사상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오류를 범하게 된다. 어떤 사상이라 규정하면 이미 무위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장은 아무 내용도 없이 텅 비어 있으므로 어떤 사상이건 다 받아들일 수 있다. 노장은 아무 사상도 아니기에 동시에 모든 사상일 수 있다.

노장의 도가는 보통 제자백가 가운데 한 학파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제자백가의 어떤 학파와도 적대적이지 않았다. 공자와 맹자 속에 도가가 깊이 스며들어 있음은 물론이고, 노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가 법가의 한비자에 의해 쓰여졌다. 병법서에는 노자가 자주 인용된다. 노장의 도가는 뒷날 중국의 온갖 사이비 과학들과 중국의 온갖 민간 종교들까지 다 받아들인다. 그렇게 해서 방대한 규모의 道藏이 형성된다. 과학과 종교는 선진시대 본래의 노장 사상과 다르다고 볼 수도 있고,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해체주의적 해석된 노장 사상은 아무 사상도 아니므로 모든 사상인 그런 사상이라고 한다면, 하이에크가 초자연을 부정하고 자연세계는 자연과학에 맡긴 채 오로지 인간세계에 골몰했다는 이유로 노장과 하이에크 사이의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주저없이 하이에크 철학은 곧 노장 사상이라고 말해야 한다. 자유인의 경제활동은 곧 무위이고, 소유의 기초한 자생적 질서는 곧 도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이에크 이해에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노장과 하이에크는 완전히 다른 지적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지적 전통에는 체계적 지식으로서의 학문(scientia)이 없다. 특히 노장의 도가는 뒤죽박죽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비체계적이다. 반면 서양의 지적 전통의 핵심에는 늘 학문이 있다. 학문 전통이 서양의 철학과 과학을 만들었다.

하이에크는 서양의 학문적 전통에 투철하지만 인간의 소유욕이 빚은 시장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가능한지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다. 그는 이성의 오만을 경계하고 근본적 무지를 강조한다. 그런 만큼 그의 철학은 다소 비체계적이다. 자생적 질서가 무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그 탓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이에크 철학이 비학문적이라거나 비체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이에크와 노장 사이에는 서양어와 중국어의 차이 외에도 학문과 비학문, 체계성과 비체계성이라는 정말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단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학문적으로 유의미한 비교작업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노장과 하이에크의 비교작업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실은 중국사상과 서양사상을 비교할 때마다 난감함을 느낀다.

비교철학은 일부러 의식적으로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이미 자신도 모르게 비교철학을 하고 있다. 비교철학은 동서가 혼융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철학적 사유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운명을 굳이 들추어내어 비교철학을 자신의 학문적 과업으로 삼는 순간, 학문적 혼란에 빠진다. , 학문적 거장이라면 물론 경우가 다를 것이다.(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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